황제 나폴레옹 생을 마감한 섬 세인트헬레나, 녹청 그리고 최고급 커피



    세인트헬레나, Jacob's Ladder 계단


    나폴레옹 유적 볼거리가 있는 세인트헬레나

     

    남대서양 중간 지점 작은 화산섬 세인트헬레나, 한때는 남미와 아프리카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쉬어가는 기항지로서 관심이 높았던 섬이었지만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존재감을 상실하고 단지 지구상의 작은 섬의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던 섬이다.

     

    그렇지만 세인트헬레나 섬은 나폴레옹이 생을 마감하였던 곳으로 섬으로 크기와 위치에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이 섬에는 나폴레옹 유적 뿐 만 아니라 오염 없는 자연경관과 열대우림부터 사막까지 존재하는 다양성으로 최근에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3주에 한 번 5일 반나절 걸려 도착하는 우편선이 유일했던 접근성이 요하네스버그에서 정기항공노선이 운항하면서 프랑스가 낳은 영웅을 찾아오는 관광객과 오염되지 않는 자연을 체험하려는 이들의 방문이 잦아들고 있다.

     


    나폴레옹 마지막거주지 롱우드하우스 longwood house


    나폴레옹이 처음 살던 집, '브리아스'와 마지막 살던 '롱우드 하우스' 그리고 무덤의 계곡은 나폴레옹이 묻힌 곳이 있다. 훗날 그의 유품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에스테이트는 최대 관광 거리다나폴레옹 에스테이트는 프랑스 행정부가 직접 담당하는 타운이자 영국령 안에 둘러싸인 프랑스 영토다.

     

     


    napoleons tomb

     

    녹청, 독 녹색

     

    구리를 공기 속에 방치하면 습기와 이산화탄소가 구리와 반응하여 염기성 탄산구리가 된다. 이것을 녹청이라고 한다. 오래된 청동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르게 녹청이 낀 구리는 그 이상 부식되지 않는다. 조직이 치밀하여 내부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알려진 빛나는 녹색은 구리조각을 초에 넣어 만들었다. 구리조각을 초에 담가 두면 구리조각에 녹색 녹이 생긴다. 이 녹을 긁어내어 풀이나 계란 노른자, 기름등의 접착제와 섞으면 화가들이 물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색을 구리 녹색이라고 부르며 독성을 가졌다.

     

    중세 이후 녹청은 얇은 구리조각을 포도주를 발효시킨 식초에 넣으면 바닥에 녹색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를 안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부부의초상>에서 부인의 화려한 녹색 드레스는 바로 이 녹청을 칠한 것이다. 하지만, 이 녹청은 쉽게 변색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다른 화가들이 그림에서 사용한 녹청은 모두 검정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에이크는 니스를 칠해서 녹청의 변색을 막았다.


     



    지오반니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의 초상 ' The Arnolfini Portrait '

    패널에 유채(Oil on panel) / 82.2 x 60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얀 반 에이크 1390-1441,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플랑드르 출신화가, 유화를 처음으로 개발한 화가로 알려진 화가로 사실적인 사물묘사, 현실적인 원근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아르놀피니 (이탈리아 무역가), 결혼식을 그린 그림으로 결혼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묘사가 재미있는 그림으로 샹들리에의 촛불 (신앙적인 의미), 크리스탈 묵주 (여성의 순셜), 강아지 (충실함)등 뿐만 아니라,



     

    보통 그림은 피사체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본인의 모습은 자화상이 아니라면 보기 어렵지만,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이란 그림에서는 그림의 한 가운데에 화가 또한 숨겨져 있다. 볼록 거울에는 방 전체가 보인다. 두 남녀 이외에 두 명의 사람이 더 보이는데 그 중의 한명이 바로 얀반에이크인 것이다. 이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이라는 그림이 진짜 결혼식 그림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신부님일 수도 또는 신부님이 아니라면 결혼의 증인일 것이다. .당시의 결혼은 반드시 2명의 증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거울에 2명이 보이도록 그려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은 결혼증명을 위한 그림이란 뜻이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은 그림의 크기 자체가 작은 그림이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었지만 그림의 중앙 위쪽에 보면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 1434"이라고 글시가 쓰여 있다작은 크기의 그림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에 너무도 세밀하게 화가 자신을 숨겨 놓았다.

     

    밝은 녹색은 부유한 시민만이 누 릴 수 있는 사치,


    1653년 브라운슈바이크의 규정을 보면 복장과 색채사용에 대한 규정으로 신분을 상징 색을 참고하면 제1신분 귀족은 빨강, 2신분은 밝은 녹색과 빨강, 3신분은 빛나거나 어두운 녹색, 4신분은 색을 약간만 사용하여 장식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순수하고 밝은 녹색은 부유한 시민만이 누 릴 수 있는 사치였다. 레오라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녹색 옷을 입고 있다.

     

     



    녹색은 나폴레옹이 가장 좋아했던 색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녹청은 산과 암모니아에 녹고, 200도에서 분해되며 유독하다. 구리에 아세트산의 증기를 작용시켜서 얻은 염기성 아세트산구리도 녹청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청색 또는 녹색 안료로 사용된다.

     

    1821년 나폴레옹이 52세의 나이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영웅이 몇 개월간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니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위암 또는 우울증이 원인 또 다른 이들은 독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60년 프랑스 화학자들이 나폴레옹의 시체를 분석했는데 결과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손톱에서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었다.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의 습한 기후 때문에 녹색 카펫과 녹색가구, 녹색가죽의 독이 용해되어 이었던 것이다.



    세인트헬레나

     

    스웨덴 학자 셀레는 구리와 비소 화합물 '셀리의 녹색'으로 1775년 안료에 대한 특허를 냈지만, 그 안료에는 비소의 강한 독성이 포함되어 있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제조업자들은 안이한 생각으로 생활용품에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비소 중독 사고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14년 독일의 슈바인푸르트에 있는 한 염료공장은 구리조각을 비소를 용해시키는 방법에서 더욱 진한 녹색을 생산하는 공법에 접근하여 성공했고, 각 지역 생산지의 이름을 더하여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거래 되었다.

     


    나폴레옹이 묵었던 방의 녹색벽지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삶을 상징하는 색채원이 들어 있는 색체론의 대가였다. 괴테는 (1749 1832) 마음을 가라앉히는 녹색의 영향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바랄수도 없다. 그러므로 항상 머무는 방에는 녹색 벽지를 바른다.”

    괴테가 살던 시대에 녹색은 거실의 색으로 인기가 있었다.

     

    녹색은 나폴레옹이 가장 좋아했던 색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823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보았던 내용을 매우 자세히 적은 일기와 편지가 공개된 경우가 있는데 그 당시 나폴레옹이 머무른 방에서 몰래 찢어온 벽지 한 조각을 소중하게 붙여 놓았고, 이 꽃문양은 갈색과 녹색이 섞여 있는데, 갈색은 원래 금색이었던 것이 바랜 것으로 그의 방은 온통 녹색으로 꾸며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의 습한 기후 때문에 녹색이 용해되어 나폴레옹은 만성적인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 -1825) David, Jacques-Louis

     

    자크루이다비드는 신고전주의 회화의 대가로 로마상에 여러 번 실패 후 1774년 입선으로

    로마 유학을 가게 되고 그 후 로마에서의 경험과 감동으로 회화에 대한 방향성을 잡고 활동하며 프랑스 혁명 시절 공화정 당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로서 문화계의 실세로 활약 하였으나, 혁명이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물러가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감옥 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감옥 에서 나온 후 나폴레옹을 만나 그를 지지하며 나폴레옹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나폴레옹의 황실 수석화가 활동하였다. 나폴레옹이 실각 한 후 그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 한 후 다시는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Jacques-Louis David, ‘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0년/ 캔버스에유채 / 259 * 221 cm


    황제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전쟁에 동행 하면서 그림을 그릴 것을 지시받았으나, 그는 동의하지 않고 대신하여 나폴레옹의 각별한 관심 하에 그려진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나폴레옹을 그리는 조건으로 그는 전쟁에 동행하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고전주의적인 색보다는 섬세한 선적 묘사를 보여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5-1807년경 /  캔버스에유채 / 629 * 979 cm

     

    루브르에서 두 번째로 큰 그림으로 각 인물들을 실물 사이즈로 표현하면서 실제 장면과는 다르게 각색한 그림이다.

     


    유배지 세인트헬레나 커피 그리고 커피향

     

    나폴레옹이 커피마니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침에도 커피가 없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 하루에 커피를 10잔 이상 마셨으며, 심지어는 이런 말도 하였다고 한다. " 내게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진한 커피, 아주 진한커피 이다. 커피는 내게 온기를 주고 특이한 힘과 쾌락과 동반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세인트할레나 High Knoll Fort


    그는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이 섬에서 먹을 만한 것은 커피밖에 없다며, 죽기 직전에도 커피 한잔 마시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인트헬레나에서 생산되는 커피 는 일생에 한 번 마셔 보기 힘든 커피이다. 세인트헬레나커피는 1732년 예멘에서 옮겨진 부르봉종으로 맛은 좋지만 병충해에 약해 생산량이 작고 다른 품종과 교배하여 질이 떨어져 왔다. 그러나 세인트헬레나는 접근이 쉽지 않았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300년 동안 원종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꽃향기가 나고 신맛 단맛 쓴맛의 조화가 완벽 하다는 평가를 받는 커피이지만 생산량이 작아 현재도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어 소수에게만 소비되어 진다.



    커피와 우울증의 관계를 연구한 역학 조사에 따르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커피 향에 내포 되어있는 향의 효과로 우울증 발병률이 낮다는 연구결과 (2002J. Linsay) 발표도 있다.


     

    나폴레옹은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녹색으로 가득한 방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울증을 넘어 녹색의 주는 안정감을 추구하면서 재기를 꿈꾸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녹색에 숨어있던 녹청 비소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5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Posted by Buna voya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