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 대표작품 '모나리자' 그리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로 건너가 신화와 불멸이 된 루브르박물관 '모나리자'
파리여행 필수 추천코스 ! 루브르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정문의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리슐리외 (Richelieu)관, 드농 (Denon)관, 쉴리(Sully)관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으며 규모는 6만600평방미터, 소장품 수는 38만여점이 소장되어있다.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온 배경 ?
151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63세에 프랑스로 거쳐를 옮긴다. 프랑스와 1세 (루이12세의 사위) 20세인 젊은 왕은 레오나르도를 ‘나의 아버지’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끊임없는 존경과 한없는 찬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퐁텐블로 fontainebleau castle성에 초대하여 극진한 대접과 최고후원을 약속한다. 레오나르도는 3~4개의 회화 작품을 가지고 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모나리자이다. 1503년 주문 받은 후 13년 후의 일이다. 미완성인체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피렌체에서 밀라노, 로마, 그리고 프랑스로 가지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 한다. 1519년 그는 프랑스와 1세 왕의 품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때까지 예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벽화나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장인에 불과 하였다.
퐁텐블로성 fontainebleau castle
프랑스 르네상스 시작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천재적인 예술가를 통해 이제 예술가는 스스로를 나타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새로움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작업하면서 기거하던 프랑스 퐁텐블로성 옆 앙브와즈 성에 뭍혔다. 프랑스와 1세는 레오나르도 작품을 중심으로 퐁텐블로성에 미술관을 꾸미고 이탈리아 미술품을 전시했다. 이곳에서 프랑스 지역 화가는 퐁텐블로파를 탄생시키며 활발한 활동을 하며 프랑스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그 후 프랑스 왕들은 모나리자를 가능한 한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놓고 보기를 원한다. 루이14세는 ‘모나리자’를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다. 나폴레옹도 빠지지 않는다. 더 이상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여인이 아니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모나리자는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성격과 가치를 지닌 예술품으로 승화 되었고 그 후 프랑스는 세계미술 흐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모나리자는 왜 유명한가?
‘모나리자’의 유명세는 도난사건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1911년 8월 ‘모나리자’가 사라진다. 도난범은 액자작업을 하던 이탈리아 출신인 페루지아. 루브르 박물관 휴관일인 월요일 아침에 페루지아는 그림들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날 화요일에서야 그 사실을 알려지고, 파리 시내는 비상사태가 벌어지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왜 모나리자를 훔쳤을까?. 이탈리아 사람 빈첸초 페루지아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프랑스인 나폴레옹이 훔쳤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가져갈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것 이 었다. 그사이에 파리에서는 유명 시인인 기염 아폴리네르와 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도난 의심 조사를 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루브르박물관 모나리자가 자리했던 빈 벽이라도 보기 위해서 붐비게 된다. 이와 더불어 모나리자의 관심도와 그에따른 유명세는 올라간다.
페루지아는 1년 반이 지난 후 다빈치의 고향인 피렌체 미술상인 제리에게 ‘모나리자 ’우피치 미술관‘에 영원히 걸고 싶다며 금액을 원한다고 흘린다. 당시 우피치 관장은 진품인 것을 알고 경찰에 신고하게 되고 결국 페루지아는 감옥에 가게되지만 오히려 이탈리아 영웅으로 추대가 되기도 한다.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
1956년 '모나리자'는 프랑스 서남부 몽토방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 도중 한 사내가 던진 산성 물질로 훼손되기도 하고, 1974년 도쿄 전시 때는 한 관람객이 장애인의 박물관 접근권 보장을 주장하며 붉은 페인트를 뿌렸다. 같은 해 볼리비아 출신의 한 사내는 '모나리자'에 돌을 던져 그림 속 왼쪽 팔꿈치 아래가 훼손된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2009년 8월2일 프랑스 시민권 취득을 거부당한 것에 분노한 러시아 여성이 모나리자 작품을 향해 찻잔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2cm방탄유리가 보호하고 있었다. 그 후 모나리자는 1962~63년 미국, 1974년 일본,
구소련 전시 외에는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다.
모나리자 그림의 비밀 ?
모나리자를 마치 성모마리아처럼 그렸다.
조르지오 바사리의 < 르네상스 예술가 전기 > 에는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 (실크 사업가)를 위해 그의 부인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모델 이름은 “리자 게라르디니”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를 남편은 유언장에서 찾아본다. 그는 라틴어 ‘물리에르 인제누아 Mulier Ingenua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리에르' 아내라는 뜻, '인제누아' 는 그 영혼이 귀족적이고 내면의 도덕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뜻 모두 가 그녀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 탄복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그녀를 모델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스푸마토’ 라는 테크닉으로
‘스프마토’ 는 “안개와 같이 흐릿하다” 는 뜻으로 밑그림 없이 수차례의 덧칠 과정을 거쳐 입가와 눈매를 약간 흐릿하게 표현하여 올라간 것인지, 내려간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콘트라포스트
당시로서는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초상화의 옆모습이 아닌 ‘ 콘트라포스트’ 자세는 모나리자를 특별하게 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이다.
배경은 여자의 몸과 지구의 몸이 같다
지구는 항상 변하고 발전하며 물은 움직이고 산은 무너지기도 한다. 이렇게 지구는 인간의 몸처럼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소우주인 인간의 몸과 대우주인 지구(자연)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는데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에서 이 같은 점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소
모나리자의 미소 뒤에는 미소에 관한 개별적인 연구가 아닌 총체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미소는 어쩌면 한 여인의 미소가 아닐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의 미소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소를 이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았기 때문
모나리자 전시 위치 드농관 2층 6번 방, 루브르 박물관 위치 안내도와 비욘세 뮤직비디오루브르박물관 투어 이야기 계속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버스에 유채 / 260*325 cm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테러 사건
외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에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에 몰입하여 바로크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 낭만주의 대표화가로 자리 매김하였던 화가는 혁명에 직접 참여는 못했지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으로 프랑스 혁명정신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로통합 전 통용되던 프랑스 100프랑 화폐에 이 작품과 함께 화가가 등장할 정도로 프랑스 역사에 중요한 작품이던 이작품에 모나리자와 비슷한 테러사건이 있었다. 2013년 2월7일 28세의 여성 한 명이 랑스의 루브르 분관에 전시돼 있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검은색 매직으로 'AE911'이라는 테러 사건으로 한 동안 전시를 중지하고 복원과정 단계를 거쳐 전시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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