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여행, 수호성이 지키는 메디치가의 영묘, 플로렌스 산 로렌체교회
피렌체여행, 수호성이 지키는 메디치가의 영묘, 플로렌스 산 로렌체교회
medici - 메디치 플라자 동상
메디치가의 영묘, 피렌체 산 로렌체교회
피렌체 산 로렌초 교회는 원래 피렌체의 교구 교회였는데 저 교회가 피렌체 대성당으로 옮겨가면서 본래교구 산 로렌초 교회는 계속적으로 낙후되기 시작 한다. 1338년, 산 로렌초 교회 책임자 그 신부께서 메디치 가문에 후원을 부탁하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는 모른 체한다. 원래 사실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가 자기의 사후에 영면할 장소로 이 교회를 선정을 한 곳이었다.
아주 낙후돼 있었던 상황에 이 코시모 데 메디치가 권력을 잡은 지 한 8년 만에 사실은 이 산 로렌초 교회를 방문하면서 남긴 고백이 하나 있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실수는 나 자신과 내 가문을 영속하게 해 줄 기념비적인 작품을 위해 10년 일찍 내 재산을 사용하지 못한 점이다.”
1442년 이 독백을 남긴 그 순간은 교회에서 가장 신성한 중앙 재단의 후원권을 메디치 가문한테 넘겨준다고 얘기를 하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방문을 해서 저 얘기를 남긴 것이다. 그동안 자기 집 앞에 위치하여 거의 매일 산 로렌초 교회가 무너져가는 걸 그대로 보면서 기다린 것이다. 교회를 최초로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메디치 가 사람들은 참 이해하기가 힘들다. 한 머리에 두 개의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 메디치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금 양면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사실 메디치 가문을 그렇게 싫어한 것도 언행이 일치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italy-이탈리아 피렌체 돔 교회, 산 로렌조 대성당
1442년 이 후 건축 위원회를 구성 조그만한 셀 하나하나로 인제 예배당을 만들어서 분양을 계획 실제로 8개의 예배당을 만들었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6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들어가면 왼쪽에 끝에 보이는 (구)성구실이라는 곳과 그 바로 옆에 메디치라고 쓰여진 곳을 메디치 가문이 소유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코시모 데 아버지의 영묘
메디치가문의 문장
산 로렌체 교회에 들어가면 왼쪽에 끝에 보이는 (구)성구실이라는 곳과 그 바로 옆에 메디치라고 쓰여진 곳을 메디치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가운데 석관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의 석관이 묻혀 있고 그 가운데에는 제단이 있고, 이제 양쪽에 코스마스, 다미안이 있고 그 위에 쪽에 하얀 부분이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의 수호성인인 복음자 요한의 부조상이 그려져 있다. 이 부조는 도나텔로가 만든 작품인데 코스마스와 다미안은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이다.
메디치 가문은 전통적으로 통풍이라는 질병이 하나 있어 사실 수명들이 길지 못하여, 그 당시에 수호성인들의 이름을 따가지고 자신들의 이름을 지으면 영생하거나 아니면 병으로부터 액막이용이 아주 좋다고 생각을 했던 풍조가 있어 성인 코스마스의 이름을 따서 큰 아들을 ‘코시모’라고 짓고, 코시모의 쌍둥이 동생은 ‘다미안’ 으로 이름을 명하지만. 다미안은 태어나자마자 1년 있다가 죽게 되고, 코시모만 살아남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이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이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부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도나텔로가 만든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와 어머니피카르다 브에리의 실제 시신이 이 안에 안장이 되있다.
niccolo-macchiavelli-니콜로 macchiavelli 피렌체
“조국에게 헌신을, 가족과 명예를 그리고 모두에게 베푼 관용은 태산과 같도다. 아아! 나의 아버지는 순결한 아내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았노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친구들에게는 안식처와 후원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이제 죽음과 함께 여기에 묻혀 버렸도다. 나의 어머니 Picarda, 당신은 나의 아버지 Giovani와 함께 안식하셨으니, 이 늙은 아들은 지난 어린 시절과 청년 날들을 슬퍼하고 부모를 잃어버린 슬픔에 젖은 조국은 비탄 하나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영묘 문장이다.
영묘 아래, 실질적으로 코시모 데 메디치가 묻혀 있는 무덤이 있고,
제일 밑에 보면 묘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꼈던 도나텔로의 무덤이 같이 있다. 그 맞은편에 설교단은 도나텔로가 만든 작품이다.
피렌체 주변 시골에서 온 농촌 가문이 고리대금업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저렇게 돈을 벌 수 있었을까?
florence-피렌체 폰 테 베 키 오 다리
교황들이 서로 교황, 자기가 교황이라고 그래서 한 때는 3명의 교황까지 나오는 교황의 혼란 시기였다. 교황의 대분열 시기 1378년부터 1427년 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인 조반니 디 비치는 이 Baldassare Cossa라는 추기경에게 추기경 모자를 담보로 (모자에 보석들이 많이 박혀 있다.) 잡고 1만 듀켓, 듀켓이라는 거는 베니스 금화 대출을 해 준다. 추기경은 그 돈을 바탕으로 1410년 드디어 교황으로 당선되는데 이 사람이 요한 23세 이다. 교황에 당선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작자들을 배제하고 교황청의 자금의 보관을 메디치 은행에게 독점을 주게된다. 이게 가장 메디치 은행이 부를 축적하게 되는 첫 번째 과정이 된다.
두 번째, 성직 취임세, annate라는 것이다.
성직 취임세는 주교가 임명이 되면 1년 동안에 그 지역에 들어오는 모든 교회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을 성금을 내야 했다. 그걸 성직 취임세라고 그러는데 성직의 임명권을 교황이 발급을 해주고 그거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은 게 누구냐면,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성직에 당선된 사람은 1년 치를 미리 내야 되고 돈이 없으니, 그 자리에서 사실은 대출을 해 주게 되고, 그 대출에 이자를 붙여서 메디치 가문이 부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메디치 가문은 고위 성직자들과 인맥 관계를 맺게 되고, 고위 성직자들은 메디치 가문과 돈으로 엮이게 되는 과정이 된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교황에 오른 요한 23세도 결국 가서는 종교 회의에서 부패한 교황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지만, 친분 관계를 계속 유지해왔던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는 3,5000플로린, 엄청나게 큰돈 보석금을 대신 내준다.
대신 요한 23세는 죽으면서 피렌체에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을 남겨주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요한 23세 영묘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대성당에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메디치가의 돈과 권력은 시민들과 어울려 '신' 중심사회에 '인간' 중심시대로의 변화된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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