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바티칸투어, 바티칸미술관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미켈란젤로 만나다.
로마 바티칸투어, 바티칸미술관,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미켈란젤로 만나다.
바티칸 광장
로마 안에 있는 작은 나라 바티칸, 교황이 거처하는 곳, 그 안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이 있다. 바티칸은 ‘음유시인’ 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교황이 승하했을 때 새 교황을 선출하는 행사 즉‘ 열쇠를 가지고’ 라는 라틴어 ‘콘클라베’ 의식이 행하여지는 시스티나 성당, 초대 교황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베드로 성당이 바로 옆으로 이어진다.
바티칸 미술관 시작배경은 약 500년 전, 로마 “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근처에서 조각품 (‘라오콘 군상’ BC 175 ~ BC 150년경, 대리석, 205*158*105cm) 발견 되면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당시 교황 율리오 2세는 즉시 주변지역을 발굴을 지시하고, 작품을 일반 대중에게 전시를 시작 한 것이 박물관의 시초가 된다.
미켈란젤로 자화상
출처 Daniele da Volterra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46)
평생을 조각가로서의 자부심으로 살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지원 하에 미술 시작하는데 ‘기를란다요’화가 밑에서 공부, 그 후 ‘베르토르도’ 밑에서 조각을 공부한다. 기를란다요 또한 시스티나 성당의 양 벽면 중 한 면을 그리는 당대의 화가이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예술 공부 와 작업이 이루어진다. 다른 화가와 달리 깊은 학문적 식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인체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직접 시체를 연구하기도 했다. 동료 조각가인 토리지아노의 작품을 혹평하다 얻어맞아서 코뼈가 주저앉는 사건으로 미켈란젤로는 평생 낮은 코로 살아가는데 특히 그는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1496년부터 1501년까지 로마에서 인생을 바꾸는 시기를 만난다.
〈잠자는 큐피드〉 조각상의 미술품 위조사건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잠자는 큐피드〉를 한 친구가 ‘이 조각 작품을 땅에 파묻었다 파낸 후 고대 조각 작품이라며 로마의 골동품상인 발다사레 디 밀라네세에게 보낸다. 발다사레는 이것을 포도밭에서 발굴된 골동품이라며 로마의 고위 성직자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Cardinal, Raffaele Sansoni Galeoti Riario, 1461–1521)에게 200두카토(Ducato)에 팔아넘겼다.
그러나 위작이라는 것이 발각되게 된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사람들이 웃든 말든, 옛날에 만들어졌든 얼마 전에 만들어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만큼 그 조각상은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1496년 6월 25일,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위조품을 샀던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을 만나고
추기경 집에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리아리오 추기경의 일을 봐주는 은행가 갈리(Jacopo Galli), 줄리아노(Giuliano della Rovere) 추기경을 (후에 교황 율리우스 2세,
율리오 2세. Julius Ⅱ, 재임 1503-1513)가 되는 비롯한 후원자들을 만나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최초의 조각다운 작품,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주문을 받는다.
미켈란젤로 <바쿠스> Michelangelo Buonarroti Bacchus 1497 Sculpture - marble 203 cm Museo Nazionale del Bargello, Florence, Italy
1497년, 은행가 갈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에로스>를 의뢰하고, 갈리는 로마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드 라그롤라 추기경을 소개한다.
프랑스 추기경은 산 페트로넬라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nella)에 둘 자신의 무덤에 사용할 조각을 주문한다. 그는 코스카나 카라라 채석장에서 최상의 대리석을 준비하여 3년에 걸쳐 작업을 한다. 스물 네 살의 청년을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한 작품이 탄생된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Pieta’ 1498-1499년 경, 대리암, 174*195cm
Michelangelo Buonarroti Pietà 1498-1499 Sculpture - marble 174 x 195 cm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Vatican City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
피에타 (Pietà)’는 연민’, ‘불쌍히 여김’, ‘경건한 마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애도함” 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켈란젤로, 성모의 옷깃에 서명을 하다.
<피에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들어서기 전 ‘산타 페트로닐라 소성당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당시 로마에서 유명한 밀라노 출신의 조각가 일 고보 (Il Gòbbo) 의 작품일거라고 이야기한다. 그 소식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성모의 가슴부분을 사선으로 두른 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조각하다. (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서명을 새겼다. 그러나 밤에 몰래 급하게 작업 하느라 “ANGELVS”를 'AGLVS'라고 잘못 새겼다가 'G' 안쪽에 'E'를 작게 새겼고 ‘N’은 아예 빠져있는 실수를 한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에 서명을 남긴 후 성당을 빠져나오면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방금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후회한다.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당신의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 ’ 자신은 그리 크지 않는 조각 하나에 서명을 하겠다고 이 밤에 이러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았다 한다.
조각은 대리석 덩어리 속에 숨어있는 개념과 형상을 해방시키는 창조적 작업!
“ 그는 조각은 돌을 깎아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덩어리 안에 숨어있는 개념과 형상을 해방시키는 창조적 작업으로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피라미드 구도로 나이 보다는 젊게 보이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주름으로 입체감을 강조한 옷자락, 누워있지만 너무 축 늘어지지 않는 예수의 주검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마리아의 이마에는 가는 선을 주었는데 이 선은 조각상이 원래 배치되는 장소를 감안 빛의 방향을 계산하여 그림자가 졌을 때 그늘의 경계선으로 마치 망사와 같은 효과를 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피에타는 산페트로닐라 소성당 바깥쪽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추기경의 묘비 평석 바로 앞에 세워졌으나, 이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산 페트로넬라 성당을 철거하게 되면서, 작품의 위치가 몇 차례 바뀌면서 미켈란젤로가 기대한 빛의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1736년에는 이동 중 성모의 왼손 손가락 네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주세페 리리오니(Giuseppe Lirioni)가 깨진 부분을 갈아서 접합시키는 등 본래의 완전한 모습을 보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피에타의 성모, 반달리즘 테러를 당하다.
1972년 5월 21일 조각상에 테러가 일어난다. 호주 국적의 헝가리 태생 지질학자로 라슬로 토트(Laszlo Toth, 1938- 2012)사람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고 외치며 성모의 얼굴과 왼팔을 지팡이 모양의 지질학용 망치로 열다섯 번이나 때려 박살내는 테러를 가한다. 그는 주변에 있던 관광객과 경찰에 체포되었고, 1년간의 재판과 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 판정으로 2년의 강제수용 치료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성모의 코가 깨지고 부서진 왼팔 등은 4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한 후 1976년에 복원하였다.
‘피에타’는 1749년 12월, 교황 베네딕트 14세 (Pope Benedict XIV)'는 '피에타(Pieta)'를 바티칸 시티 '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Vatican City'의 현재의 위치로 옮기라고 명령하면서 이탈리아의 건축가 프란세스코 보로미니 (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만든 둥근 타원형의 ' 코타넬로 Cottanello' 대리석의 기단도 함께 옮겨져 성 베드로 성당 끝에 위치하고 있다.
천장에 있는 그림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정면 제단 뒤 벽화는 ‘최후의 심판'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1508-1512
정식명칭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The Sistine Chapel Ceiling)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는 조각을 선호했다. 그는 성공한 후에도 스스로를 항상 조각가라 불렀고, 회화는 물감으로 외양을 모방해 착각을 일으키는 작업으로 보았다.
미켈란젤로는 열세살인 1488년 4월 1일에, 당시에는 유명했던 피렌체의 화가 도메니코와 다비데 기를란다요(Domenico와 Davide Ghirlandaio) 형제의 공방에 들어가 작업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서 기본 교육을 받으며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Santa Maria del Carmine) 성당의 브랑카치 예배당의 마사초의 벽화를 모사하면서, 1년 동안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드로잉과 템페라 그리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평생 조각가를 자처하던 미켈란젤로가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그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천지창조는 4단계작업으로 구성된다.
1. 2개의 곡면 벽화에 3가지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을
2.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그리고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3.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4.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를 완성한다.
프레스코화
교회 벽면에 그려진 이 벽화들을 ‘프레스코화’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fresh라는 의미이다. 그 당시에 벽면이 보통 그 거칠거칠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 하루 작업 분량만큼을 뜯어내고 석회석과 모래를 반죽하여 벽에다 붙인다. 물기가 있는 그곳에 안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석회석과 모래 그리고 물, 그리고 안료가 같이 섞이면서 하나의 결정체가 나오는 것이다. 이게 붙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하루에 그릴 만큼의 양, 그걸 ‘조르나타’ 라고 하는데 당시 보통 화가들이 보통 하루에 할 수 있는 양이 가로 1.2m, 세로 1.5m 정도였다고 한다.
Michelangelo,_Giudizio_Universale
1536-1541년 경, 프레스코, 1370 * 1200cm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시스티나 (콘클라베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 성당뒤쪽의 엄청난 크기의 작품으로 미켈란젤로가 천치창조를 완성한 지 23년 후 1536년, 나이가 66세가 되었을 때 그린 것으로 등장인물이 모두 나체 작품으로 교황의 의전관 ‘비아조 다 체세나’는 목욕탕용 그림이라 비판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작업 마자막에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인물로 체세나 얼굴을 표현하여 소심한 복수한다. 또한 바로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늘어진 사람의 껍질의 얼굴에는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을 그려 넣고 완성한다. 한 참 후에 후배화가 ‘다니엘라 다 볼테라’가 헝겊을 주요부분에 그려 넣는 작업을 하여 기저귀 화가라로 불리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로마에서 91세 나이로 사망 후 피렌체에 매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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